2013년 저는 인터넷을 통해 스무 회 이상 연재한 글을 묶어서 『나는 아빠다』(알마, 2013)라는 제목의 책을 냈습니다. ‘나는 아빠다. 어린 딸의 아빠이고 어린 아들의 아빠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 이 책은 육아와 자녀교육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따라서 사회에 대한 비평과는 거리가 멀었고, 가족이라는 공간과 그 공간에서 펼쳐지는 관계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우선 부모가 만든 우주 안에서 자라므로, 힘들어도 비정한 사회를 탓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사회구조가 아무리 악하고 비참해도, 아이의 하루는 어김없이 시작됩니다.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을 때만큼은 세상을 탓하지 말자, 세상이 나쁘게 변했다 해서 아이를 그 나쁨에 맞출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습니다. 굳이 사회 시스템을 논하지 않더라도 부모의 결단만 있으면 아이의 아침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아이는 전속력으로 자랍니다. 사회의 구조적 개혁 없이 어떻게 제대로 자녀교육을 하겠느냐는 반론도 있었습니다. 그런 반론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빠다』는 육아를 구조적 문제로 보지 않고, 내재적 문제로 이야기했습니다. 아빠로서 아이에 대한 책임을 함부로 덜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회가 아무리 우울해도 아이는 매일 아침 웃으면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에게는 다음 세대를 위해 좀 더 인간적인 모습을 지닌 사회를 만들 책무가 있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좋은 사회를 물려주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 어떤 사회가 더 좋을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려면 우리 사회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따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우리 사회가 아이들이 커서 살기에 마땅하지 않은 사회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인이 되어도 좀처럼 자립하기 힘든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사회는 개인에게 능력과 성실함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존재에 대한 대가를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크기의 돈으로 요구합니다. 사회가 개인의 자립을 방해합니다. 전 세계 자본주의 역사에서도 그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창적인 사회입니다.
이 독창적인 ‘목돈사회’는 너무나 위험해서 부모로 하여금 자식이 성인이 되더라도 함부로 독립하게 놔둘 수 없게 합니다. 경제적 자립은 가능하지도 않고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수성가의 신화는 사라졌습니다. 신화만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자식 세대가 온전히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는 자식들이 잘 알고 부모도 본능적으로 알아챕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그리고 취업을 해도 부모로부터 자립하지 못한 자식들이 부지기수이며 마찬가지로 이 사회는 자식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부모로 가득합니다. 부모가 자식의 인생으로부터 독립할 수 없고, 자식도 함부로 부모로부터 자립할 수 없는 까닭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목돈사회의 비정함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과 물질숭배, 배금주의 문화 때문에 그러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견해는 문제의 핵심을 온전히 장악하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확실히 서구에서 수입되었으며 서구적으로 배양되었습니다. 하지만 순수하게 배양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국식으로 배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겉모습뿐만 아니라 속속들이 외국 시스템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책은 목돈사회라는 프레임으로 그 차이를 탐구합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자식이 자립하기 어렵고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독립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정작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성인이 된 자식이 부모로부터 자립하고 부모가 자식의 인생으로부터 독립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보여줍니다. 목돈사회의 문제는 학자들에 의해 개념화되고 법률에 의해 법제화된 구조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은 외면하고 침묵했는지도 모릅니다. 외국의 텍스트와 사례에는 없는, 우리 사회에 ‘고유하게’ 자리 잡은 내재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구조라면 구조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목돈사회를 사회학적으로 연구하지는 않습니다. 목돈사회가 어떤 윤리적이면서도 인간적인 가치를 위협하는지를 검토합니다. 사람들은 비판을 그것에 내재된 가치로 평가하기보다는 실용성으로 비판의 논점을 바꾸는 습관이 있어서 결국 대안을 요구합니다. 사회적 책임을 외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 책에서도 몇몇 대안이 탐구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비판은 현재성을, 대안은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술어가 주어를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목돈사회의 문제점을 다들 막연하게나마 느낍니다. 하지만 느끼는 것과 인식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느낌이 인식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언어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공론이 생깁니다. 이 책의 목적은 대단한 게 아닙니다. 그저 목돈사회라는 담론을 공론화하는 것입니다. 사회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도처에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소득의 양극화를 염려합니다. 그런 염려의 절반만이라도 세대 간 양극화에 쓰이길 바랍니다. 50, 60대의 어른 세대는 가난했으나 다 같이 가난했고 그만큼 자립하기 쉬웠습니다. 당신들의 청춘은 그윽했고 준비할 것이 없었습니다. 당신들은 너무나 많은 기회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과거를 추억하고 자꾸 향수에 젖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회가 고갈되면 비명이 생긴답니다. 지금의 청년 세대는 어른 세대의 자욱한 욕망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 연약해 도모해볼 인생이랄 게 별로 없습니다.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인생이 결정되고 맙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 부모는 자식으로부터 독립할 수 없습니다. 목돈사회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다음 세대의 자립을 위협합니다.
[에필로그]
여러분, 한국 사회는 어째서 ‘헬조선’이 되었을까요? 지금까지 저는 이 책을 통해 그 까닭을 이야기했습니다. ‘목돈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앞선 세대가 다음 세대에 좋은 사회를 물려주지는 못할망정 괴롭혀서야 되겠습니까? 이 나라 젊은이는 저마다 지참금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 지참금은 결국 자신이 어떤 가족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증명합니다. 푼돈이 아니라 소득을 압도하는 목돈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의 절망을 들어보십시오.
사실 ‘헬조선’이라는 표현은 어폐가 있습니다. 돈이 많은 부자에게 한국 사회는 기회의 땅일지언정 지옥은 아닙니다. 그리고 기성세대에게도 지옥일 리 없습니다. 그들 세대는 시대가 어려웠을 뿐, 인생 자체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살았던 사회는 사람들에게 성실한 노동만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광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기성세대가 영광에 취한 사이, 목돈이라는 괴물이 자랐습니다. 이제 사회는 개인에게 성실한 노동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능력을 초월하는 목돈을 ‘존재에 대한 대가’로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활력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이 세대는 가족의 도움 없이는 자립할 수 없습니다. 경제적 자립 없는 개인의 자유는 병약합니다. 이것이 한국 사회의 고유한 문제입니다. 외국 사례를 연구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어둠이 있게 마련입니다. 슬픔과 절망이 없는 사회는 없습니다. 하지만 희망이 자라고 새로운 활력이 생긴다면 우리는 다 같이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전후 한국 사회였으며 80년대까지 지속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어른 세대는 자식 세대에게 희망을 걸었습니다. 그 덕분에 자식 세대는 자립하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가난과 고난은 그것을 극복했을 때 명예가 됩니다. 그렇지만 희망이 자라지 못하고 활력을 기대할 수 없다면 그 사회는 ‘지옥’이 됩니다. 지금의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이 목돈사회는 그들 부모 세대와는 정반대로 젊은 세대를 구조적으로 억압합니다. 그래서 그들 자신도 고통을 겪습니다. 그들도 자식의 목돈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러지 맙시다. 힘센 사람이 무거운 짐을 드는 법입니다. 힘없는 사람들의 어깨 위에 더 무거운 짐을 얹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걷게 합시다. 그것이 사회의 흔한 정의입니다. 목돈사회는 이 정의를 거꾸로 뒤집어놓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다시 돌려놓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