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소녀] 시간은 우릴 기다려주지 않아
Jun 27, 2007이 세상에서 사람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것을 하나 꼽는다면 무엇이 떠오르세요. 바로 "시간"이 아닐까요. 어떤 순간은 더할 수 없이 느릿하게 흘러가고, 어떤 순간은 쏜살과도 같이 눈깜짝할 새에 지나가 버립니다. 하지만 사람이 체감하는 느낌의 차이가 있을 뿐 초분시의 단위로 계량을 한다면 시간의 절대적인 가치는 어느 누구라고 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시간이라는 낱낱의 단위가 모여 세월을 이룰 때는 그 의미가 더욱 절박해집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유한한 생명을 부여받은 인간에게 이보다 더 절박하고 간절한 소원이 어디메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걸 너무 잘 알기에 지나간 시간은 늘 아쉬운 거겠지요.
타임머신, 타임라인. 타임리프. "시간을 거스른다"는 소재는 SF 영화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미래로 날아가거나 과거로 되돌아간다"는 내용을 줄기로 다룬 영화를 꼽아보자면 영화광이 아니더라도 열손가락에 열발가락을 다 꼽아도 손발이 모자랄 만큼 차고도 넘칠 겝니다. 미래에서 온 사람, 과거로 되돌아간 나를 다루는 영화, 과거와 현재가 동접하는 영화, 혹은 SF 영화가 아니더라도 "이터널 선샤인", "메멘토" 등 시간을 역행하는 영화 등 시간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거부할 수 없으면서 끌려갈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의 요소일 때문일까요. 그래서 시간을 통제한다는 건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상상이었겠지요.
치아키와 코스케의 단짝친구인 주인공 마코토는 마치 순정만화 "캔디캔디"의 씩씩한 주인공 캔디처럼 늘 쾌활합니다. 게다가 어느날 과학 실험실에서 우연히 시간을 통제하는 능력을 부여받은 이후로 마코토는 지나간 시간 따위 아주 손쉽게 불러낼 수 있는 우스운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노래방에서 남은 시간 5분을 늘리는 것쯤이야 가볍습니다. 엊그제 저녁 엄마가 해주신 맛있는 철판구이는 원할 때마다 언제든 먹을 수 있구요. 요리 실습시간, 엉망진창을 만들어버린 내 실수 따위야 친구에게 슬쩍 밀어넘길 수도 있었습니다. 그저 냅다 내달려 몇 번 구르기만 하면 되는 거였거든요. 하지만 몇 번을 되돌려도 바꿀 수 없는 게 있음을 마코토는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덧 커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구요.
"나.이.스. 데이" 나나-7. 이치-1. 쓰리-3, 7월 13일은 나이스데이라며 TV 방송의 번잡스런 멘트가 깔리며 시작되는 이 영화는 어딘가 모르게 "Groundhog day, 성촉절"의 시작을 알리며 시작되어 영화 내내 그 하루가 되풀이되는 영화 "사랑의 블랙홀"을 닮아 있습니다. 이유없이 성촉절이 하루하루 반복되고 그 시간 안에 갇혀버린 지루한 일상, 이젠 언제 누가 말을 걸어오는지, 몇 시에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까지 빠짐없이 외워버린 주인공 빌 머레이. 그러던 중 어느 날 눈을 돌려 진실한 사랑에 빠지면서 그 블랙홀 같은 하루에서 벗어난다는 유쾌한 로맨스코미디였죠. 하지만 그처럼 가볍게 시작한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예상한 만큼 그닥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누구나 꿈꿔볼 수 있는 즐거운 상상에, 동화적인 감성을 차차 벗어던지는 성장과 자기 성찰, 그저 수동적으로 나를 가둬 버리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앞으로 달려 나아가야 하는 이유,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이미 정해진 운명같은 고귀한 우정과 사랑, 시간이 멈춰버린 곳에서 그가 떠난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 내 마음 속 진실 등. 참 매혹적인 내용이 순정만화 같은 이 작은 영화 안에 맛깔스럽게 잘 버무려져 있습니다.
치아키의 거부할 수 없는 고백을 마코토가 몇 번이나 들어야 했던 저 골목길의 갈림길 표식처럼 시간은 우리에게 늘 "최선의 선택"을 재촉하는 고민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또 마코토가 몇 번이나 굴러서 시간을 되돌려야 했던 기찻길 횡단보도의 빨간 신호등처럼 늘 우리를 방해하는 "고난의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늘 언제나 그렇듯이 똑같이 주어진 시간은 어느 누구에게는 백배로 늘려지기도, 그냥 버려지기도 합니다. 내달려 뛰어 시간을 얻는 건 이제 대수롭지 않거든요.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지만, 그렇다고 내가 시간에 몸을 맡겨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여기서 사족하나. 시간을 따라잡는 소녀 마코토가 모든 가용한 타임리프 횟수를 다 써버리고 만 후 혼자 힘으로 달려 가는 장면이 하나 있었습니다. 마코토는 힘이 딸려 점점 뒤처져 스크린 밖으로 사라지지만 화면에 다시 나타나 결국 자신을 비추는 카메라보다 더 빨리 달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떠나가는 치아키를 등 떠밀어 화면밖으로 밀어내는 마코토. 하지만 곧 화면안으로 치아키는 다시 등장하죠. 직업정신이라 해야 하나요. 이 영화를 보면서 사실 저희 책『플래시 MX 카툰 애니메이션』이라는 책이 떠올랐습니다. 이 책에서는 애니메이션 작법에 대한 이야기를 훑어주며 플래시로 간단한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습니다. 사실 플래시 MX 버전 책이기도 하지만 액션스크립트 하나 없이 플래시의 기본 기능을 활용해 누구나 간단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볼 수 있게 하는 책이지요. 이 책에서도 언급한 카메라 촬영기법에 패닝(Panning)이라는 기법이 있습니다. 바로 이 장면이 이 패닝 기법을 너무 잘 활용한 장면이었거든요. 화려한 기법과 묘사가 난무한 애니메이션과 달리 간결하게, 그러면서도 깊은 내용을 담아낸 작은 영화였기에 더 눈이 번쩍 뜨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곧 7월입니다. 7월 13일. 나이스 데이가 오면 큰 운동장에 가서 한번 달려보고 남들이 안보는 구석에서 한번 데구르르 굴러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달려보면 그 시간이 제게도 되돌아 올지도 모르거든요... :)
시간은 우릴 기다려주지 않아. 하지만 오지 않는다고 그냥 멍하니 기다리지는 않겠어. 내가 달려가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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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의 압박. -.= 주제는 살아있는 동안 알차게. / 패닝은 스카페이스였나요? 평화로운 분위기의 해변도로에 머물던 카메라가 도로 옆 건물 욕실에서 일어나는 전기톱 살인장면으로 이동하는 장면이 압권이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