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기] 어른들을 위한 슬픈 잔혹 동화: 판의 미로
Dec 16, 2006어른들을 위한 슬픈 잔혹 동화.
멕시코 출신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 “판의 미로”. 글쎄. 이 말 말고는 이 영화를 간결히 표현할 수 없는 말이 달리 떠오르지 않습니다.
"Pan's Labylinth"라는 원제의 영화가 우리 나라에서는 제목이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라는 군더더기 같은 부제를 달고 국내에서 개봉했습니다. 게다가 "비밀의 문이 열리는 순간 기이한 판타지의 전설이 깨어난다"라는 환상적인 헤드카피를 달고...
여기에는 마치 "해리포터 연작"이나 "나니아연대기: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등의 판타지 영화 취향의 관객을 모아서 어떻게든 영화를 팔았어야 하는 홍보 마케팅 회사의 고뇌가 한몫 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책도 출판할 때 부제를 달아 내는 경우가 많은데 아무래도 『구글해킹』이나 『Ajax 인 액션』처럼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책이 있는가 하면 『조엘 온 소프트웨어: 유쾌한 오프라인 블로그』나 『이클립스 RCP: 설계에서 구현, 배포까지 자바 GUI 애플리케이션 개발의 모든 것』처럼 부제로서 책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하거나 대상 독자를 현혹(!)시키고자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겠죠.
여하튼 몇 년 전 개봉해 평단의 호평을 받았던 “지구를 지켜라”를 영화 상영 초반 홍보사에서 가벼운 코미디물로 둔갑시켜 극장을 찾았던 관객들이 접점을 찾지 못했던 사례와 같은 반응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벼운 어린이 대상 판타지물인 줄 알고 극장을 찾은 관객은 “판의 미로”에 대해 혹평을 쏟아내고 있거든요. 물론 영화에 대한 평가야 전적으로 상대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시 영화이야기로 돌아가서... 사실 영화 이야기를 쓸 때에는 자신의 호불호보다는 대상에 대한 애정을 견지한 채 통찰하는 글을 써야 한다는 공감가는 어느 영화기자의 블로그 글도 있었지만, 이 글은 전문평론은 아니니 이점은 양해해주시길 바라며..
스페인 내전의 암울한 현실과 그 현실에 대항하는 저항군의 이야기와, 마치 그에 거울처럼 댓구를 이루는 소녀의 세 가지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 모험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펼쳐집니다. 판타지는 판타지로 존재할 때 그 가치가 있기도 하지만 현실에 교묘하게 접목시켜서 “굳게 땅에 발을 내린” 판타지가 되었을 때 어떤 영화보다도 '현실적'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가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인지 세상에서 더할 수 없이 슬픈 영화로 막을 내리는 것인지는 관객의 몫에 달려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맞물려 같은 장면으로 시작하고 끝맺는 이 영화에서 사실 어느 쪽이 진실이고 거짓이었음은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녀가 엄마 뱃속에 있는 자신의 동생에게 들려주는 짧은 이야기는 그래서 쉽게 듣고 지나칠 수 없습니다.
높은 산에 홀로 피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장미가 있었어. 사람들은 이 장미에 돋아 있는 독가시를 두려워하며 아무도 꺾을 생각을 하지 못했지. 힘들다 힘들다 말로는 살기 너무 힘들다는 말만 내뱉으며... 살아갈 방법은 바로 거기에 있었는데 말이지.
덧. 결국 이 아름답고 심오한 유럽영화를 “어린이의 눈으로 바라본 슬픈 전쟁의 역사와, 그 어려움을 혈혈히 딛고 이겨 나가는 도전을 다룬 아름답고 슬픈 어른들의 잔혹동화”라고 홍보했다면 과연 지금만큼이라도 관객이 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니 사실 홍보대행사의 고충도 이해할만 합니다. 그야말로 딜레마죠. 아, 그렇다고 이 주관적인 글에 이끌려 섣불리 판단을 내리지는 마시고. 기존 영화들과는 달리 컴퓨터그래픽에도 많이 의존하지 않고 직접 수공으로 제작하고, 여타 판타지 영화처럼 이렇다할 원작소설에도 기대지 않고 이렇게 아름답게 자아낸 이 가슴저린 판타지를 직접 확인해보시길. 가끔 나오는 잔혹한 장면은 사실 전쟁의 실상에 비한다면 그렇게 아프지는 않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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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제 봤는데 마지막에 너무 슬펐어요. ㅠㅠ 그런데 인터넷 예매할 때와 상영관 입구의 노약자나 임산부는 관람을 피하라는 경고문은 정말 깨더군요.
별로 관심 없었는데... 보고싶어지는걸요.
:-)